52세에 아이들을 위해 담배를 끊다

그날 저녁, 주방의 불빛은 너무 밝았다.
내 아들은 22살이었고, 내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는 그 소년보다 이미 더 컸다. 저녁을 먹으러 와 있었고, 우리는 접시를 치운 뒤에 늘 하는 사소한 가족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 장보기, 고장 난 휴대폰 충전기, 별일 아닌 것들. 아내는 싱크대 앞에 있었다. 내 손에는 라이터가 있었고, 나는 예전처럼 걱정을 손에 잡히는 무언가로 바꾸듯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고 있었다.
그 정확한 순간에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 디테일이 중요한 이유는, 그 자리에 담배 한 개비도 없었는데도 그 습관이 대화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라이터를 보며 말했다. “어릴 때는 그 소리만 들으면 아빠가 어디 있는지 늘 알 수 있었어요.”
비난도 아니고, 슬픈 음악도 아니었다. 그는 거의 아무렇지 않은 듯, 마치 오래된 냉장고 소리를 떠올리는 사람처럼 그 말을 했다. 찰칵. 잠깐 멈춤. 찰칵, 한 번 더. 발코니에서, 서재에서, 문간에서, 장거리 운전 전의 차 안에서 들리던 작은 금속성 소리. 나는 딱 한 번 웃었다. 달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웃음을 멈췄다. 그가 화제를 넘긴 뒤에도 그 문장이 계속 내 안에서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익숙해지게 만든 소리
나는 19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아들이 그 말을 했을 때쯤, 담배는 내 삶에 27년째 자리하고 있었다. 아내는 18살에 시작했고, 우리는 성인이 된 뒤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을 쌓아 올리고 있는지도 이름 붙이지 못한 채 함께 피웠다. 가장 심할 때 나는 하루에 담배를 40개비쯤 피웠다. 우리 둘은 하루에 대략 세 갑을 함께 비워 냈다. 그건 거친 주말이 아니었다. 그게 보통의 삶이었다.
아이들은 집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집을 배운다. 어느 마루판이 삐걱거리는지 안다. 지친 부모의 목소리 톤을 안다. 커튼에 밴 냄새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도 알기 전에 먼저 알아챈다.
내 아들은 그 라이터 소리에 익숙했다.
그 대목은 도저히 귀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수년 동안 담배는 내 사적인 문제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왔다. 내 폐, 내 돈, 내 시간. 다시 실패가 온다면 그것도 내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 사적인 생각이 얼마나 거짓이었는지 보여 주었다. 가족이 사는 집 안에서 반복되는 습관은 그 집안의 날씨 일부가 된다. 대화가 오가는 자리를 바꾼다. 겨울이면 아버지를 발코니로 내몬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다음 문장 사이에 멈춤을 만든다.
나는 그 말을 죄책감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죄책감은 또 다른 정체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아들이 건넨 그 한마디가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이게 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훈계가 아니라, 거울
이상한 점은 그가 내게 담배를 끊으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길게 말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를 실망시켰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나는 아마 예전처럼 자동적으로 나를 변호했을 것이다. 스트레스, 일, 타이밍, 이미 끊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익숙한 안개.
대신 그는 내게 기억 하나를 건넸다.
흡연하던 부모가 담배를 끊게 되는 계기는 늘 극적인 경고가 아니다. 때로는 그 습관을 당신보다 더 오래 지켜본 사람이 건네는 평범한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어릴 적의 그가 복도 문 옆에 서서 내가 밖에서 담배를 다 피우길 기다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1분만”이라고 말해 놓고 그 1분을 필요 이상으로 늘리곤 했던 것도 기억했다. 연기 냄새를 묻힌 채 다시 들어와 대화가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척했던 것도 기억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작은 부재는 쌓인다.
아내에게도 담배와 얽힌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임신과 수유 기간에는 완전히 끊었다. 그러다 그 습관이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왔고, 그걸 더 쉽게 만든 데 내가 한몫했다는 걸 안다. 억지로 뭘 시켜서가 아니었다. 연기를 다시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 어른은 그 안에 충분히 오래 앉아 있으면 덫도 가구처럼 바꿔 버릴 수 있다.
이유는 빗겨 왔다
나는 예전에는 담배를 끊을 이유가 명령처럼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강 경고, 최후통첩, 생일 약속, 새해 다짐. 습관을 눌러 이길 만큼 큰 소리여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빗겨 왔다.
아들이 떠난 뒤에야 나는 다시 라이터를 집었다. 잠깐 그것을 들고 있으니, 아들이 들었을 그 소리가 들렸다. 준비의 소리도 아니고, 안도의 소리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아직 집 안에 있으면서도 또다시 방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팠지만, 그 아픔은 맑았다. 내가 나쁜 아버지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그 습관이 내가 인정한 것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해 왔다는 걸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건 다르다. 수치는 숨으라고 하고, 분명함은 보라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담배를 끊는다는 말은 문장으로 써 놓으면 고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내 삶에서 그것은 더 작고 더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다 큰 아들이 주방 식탁에서 라이터 이야기를 꺼낸 순간이었다. 그 습관이 그의 어린 시절 사운드트랙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이었다. 앞으로의 세월에는 같은 소리를 싣고 싶지 않다고 결심한 일이었다.
그날 밤 내가 영웅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나만의 일이라고 가장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단순한 이야기 이상을 원하게 된다면, J. Freeman이 안내서에 전체 경로를 정리해 두었다. 한 걸음씩, 당신의 속도에 맞춰, 담배 몇 갑 값 정도로.


